“그날, 바다로부터 북풍(노르드먼)이 왔다.”
9세기 잉글랜드. 북유럽의 해적 무리인 바이킹이 노르만 돛단배를 타고 몰려왔다. 그들은 단순한 약탈자가 아니었다. 대군을 이끌고 대륙에 진출하여 영국의 땅을 지배하고 왕조를 위협한 진정한 침략자들이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공을 배경부터 전개, 주요 전투, 정치적 변화, 장기적 영향까지아주 상세히 풀어봅니다.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공 (9세기) - 역사의 전환점
🔹서론: 바다의 늑대들이 온다
9세기는 유럽 역사에서 '바이킹 시대'라고 불리는 격동의 시기였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출발한 노르드인들이 바다를 건너 유럽 각지를 휩쓸었고, 그 중에서도 잉글랜드 침공은 가장 극적이고 역사적 의미가 깊은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단순한 약탈이 아닌 정착과 정복을 목표로 한 이들의 침공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운명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침공의 배경과 원인
🔹스칸디나비아의 사회적 변화
9세기 스칸디나비아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경작지 부족으로 인한 사회적 압박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특히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는 강력한 왕권이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부족장들과 자유농민들이 압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바다로 나섰고, 그 목표 중 하나가 바로 비옥하고 상대적으로 방어가 약한 잉글랜드였습니다.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
바이킹들의 침공을 가능하게 한 핵심 요소는 뛰어난 조선술이었습니다. 롱보트(Longship)라고 불리는 그들의 배는 얕은 강에서도 항해가 가능했고, 해안에 직접 상륙할 수 있어 기습공격에 최적화되어 있었습니다. 용머리 장식이 달린 드라카르(Drakkar)는 바이킹 침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잉글랜드의 취약성
9세기 초 잉글랜드는 웨섹스, 머시아, 노섬브리아, 이스트앵글리아 등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왕국 간의 갈등과 경쟁은 외침에 대한 통합된 대응을 어렵게 만들었고, 해안 방어 시설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수도원들이 보유한 막대한 부는 바이킹들에게 매력적인 표적이 되었습니다.
🏹침공의 전개 과정
🔹린디스판 습격 (793년) - 침공의 서막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공은 793년 6월 8일 노섬브리아의 린디스판(Lindisfarne) 수도원 습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성스러운 섬에 대한 갑작스러운 공격은 당시 기독교 세계에 엄청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를 "이교도들이 하나님의 성소를 파괴하고 피로 더럽혔다"고 기록했습니다.
린디스판 습격의 의미는 단순한 약탈을 넘어섰습니다. 이는 바이킹들이 기독교 성지조차도 거리낌 없이 공격할 의지와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수도원의 금은보화, 성유물들이 약탈당했고, 수도사들은 살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초기 습격의 확산 (794-834년)
린디스판 이후 바이킹들의 습격은 점점 빈번해졌습니다. 794년에는 웨어마우스(Wearmouth)와 자로우(Jarrow) 수도원이, 795년에는 아일랜드의 레흘린(Rathlin) 섬과 스코틀랜드의 이오나(Iona) 수도원이 공격받았습니다.
이 시기의 바이킹 활동은 주로 '히트 앤 런(Hit and Run)' 전술에 의존했습니다. 그들은 빠른 속도로 해안에 상륙하여 약탈을 마치고 바다로 도망치는 방식을 반복했습니다. 잉글랜드 동쪽과 남쪽 해안의 수많은 수도원과 마을이 이런 공격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대침공의 시작 (835-865년)
835년 셰피(Sheppey) 섬에서 25척의 바이킹 함대가 처음으로 겨울을 보내면서 바이킹 침공의 양상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단순한 약탈자가 아닌 정착을 고려하는 침입자가 되었습니다.
840년대와 850년대에는 바이킹 침공의 규모가 급격히 확대되었습니다. 851년에는 350척의 거대한 함대가 템스 강을 따라 올라와 런던과 캔터베리를 공격했습니다. 이때부터 바이킹들은 단순한 약탈보다는 영토 확보와 정착에 더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대이교도군의 침공 (865-878년)
865년, 바이킹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이바르 더 본리스(Ivar the Boneless), 할프단(Halfdan), 우베 라그나르손(Ubbe Ragnarsson) 등이 이끄는 '대이교도군(Great Heathen Army)'이 잉글랜드에 상륙했습니다. 이들의 목적은 더 이상 약탈이 아닌 정복과 영구 정착이었습니다.
🔹이스트앵글리아 정복 (865-869년)
대이교도군은 먼저 이스트앵글리아에 상륙했습니다. 에드문드 왕(King Edmund)은 처음에는 바이킹들과 평화협정을 맺고 그들에게 말과 보급품을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869년, 바이킹들이 본격적인 정복에 나서자 에드mund 왕은 저항했고, 결국 헥슬톤(Hoxne) 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했습니다. 에드문드의 죽음은 후에 그를 순교자 성인으로 만들었고, 베리 세인트 에드먼즈의 수호성인이 되었습니다.
🔹노섬브리아 정복 (866-867년)
866년, 바이킹군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노섬브리아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노섬브리아는 내전 상태였는데, 오스베르트(Osberht) 왕과 엘라(Ælla) 왕이 왕위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바이킹들은 이 혼란을 이용하여 요크(Eoforwic, 현재의 York)를 점령했습니다.
867년 3월 21일, 두 노섬브리아 왕은 연합하여 요크를 탈환하려 했지만 참혹한 패배를 당했습니다. 두 왕 모두 전사했고, 노섬브리아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바이킹들은 괴뢰 왕 에그베르트(Egbert)를 세워 노섬브리아를 간접 통치했습니다.
🔹머시아 정복 (867-874년)
노섬브리아를 정복한 후, 바이킹군은 머시아로 남하했습니다. 867년 노팅엄(Nottingham)을 점령한 그들은 머시아의 부르흐레드(Burgred) 왕과 그의 동맹인 웨섹스의 에셀레드(Æthelred) 왕의 연합군과 대치했습니다. 이때는 평화협정으로 일단락되었지만, 바이킹들의 머시아 정복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872년, 바이킹군은 다시 머시아를 침공했고, 이번에는 더욱 체계적으로 영토를 장악해나갔습니다. 874년, 부르흐레드 왕은 결국 왕위를 포기하고 로마로 망명했습니다. 바이킹들은 체올울프(Ceolwulf)라는 괴뢰 왕을 세웠고, 머시아는 바이킹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과 웨섹스의 저항
🔹웨섹스 침공 (870-878년)
이스트앵글리아, 노섬브리아, 머시아를 차례로 정복한 바이킹들의 다음 목표는 웨섹스였습니다. 870년, 바이킹군은 웨섹스를 침공했고, 레딩(Reading)에 요새를 구축했습니다. 이때부터 웨섹스와 바이킹 간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애슈다운 전투 (871년 1월 8일)
871년 1월 8일, 애슈다운(Ashdown) 평원에서 웨섹스군과 바이킹군 간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당시 웨섹스의 왕 에셀레드와 그의 동생 알프레드가 군을 이끌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웨섹스군은 드물게 바이킹군을 크게 물리쳤고, 바이킹의 왕 바그세크(Bagsecg)와 5명의 야를(Jarl)이 전사했습니다.
애슈다운 전투의 승리는 웨섹스인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지만, 바이킹들의 침공은 계속되었습니다. 871년 한 해 동안만 9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졌고, 에셀레드 왕이 전사하면서 알프레드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알프레드 왕의 초기 고난 (871-878년)
알프레드 왕(재위 871-899)은 즉위 초기부터 끊임없는 바이킹의 침공에 시달렸습니다. 878년 1월, 구트룸(Guthrum)이 이끄는 바이킹군이 기습적으로 칩펜햄(Chippenham)을 점령하면서 웨섹스는 최대 위기를 맞았습니다. 알프레드는 왕실 가족과 함께 서머셋의 애설니(Athelney) 늪지대로 피신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는 알프레드에게 시련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재기를 위한 준비의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늪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조직하며 바이킹에 대한 저항을 계속했고, 웨섹스의 충성스러운 신하들과 연락을 유지했습니다.
🔹에딩턴 전투와 웨드모어 협정 (878년)
878년 5월, 알프레드는 마침내 반격에 나섰습니다. 윌트셔의 에그베르트 석(Egbert's Stone)에서 소머셋, 윌트셔, 햄프셔의 군대가 집결했고, 알프레드의 귀환에 백성들은 열광했습니다.
878년 5월 6일부터 12일 사이에 벌어진 에딩턴(Edington) 전투에서 알프레드는 구트룸의 바이킹군을 완전히 격파했습니다. 바이킹들은 칩펜햄으로 후퇴했지만, 알프레드군에 의해 포위되어 2주간 농성을 버텨야 했습니다.
결국 구트룸은 항복했고, 웨드모어(Wedmore)에서 역사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 이 협정의 주요 내용은:
●구트룸과 30명의 주요 바이킹 지도자들이 기독교로 개종
●알프레드가 구트룸의 대부가 됨
●잉글랜드를 웨섹스(알프레드 지배)와 데인로(바이킹 지배)로 분할
●상호 불가침 협정
🏹 데인로의 성립과 바이킹 정착
🔹데인로의 지리적 범위
웨드모어 협정 이후 성립된 데인로(Danelaw)는 대략 현재의 워트링 가도(Watling Street) 북동쪽 지역을 포괄했습니다. 여기에는 요크셔, 링컨셔, 노팅엄셔, 더비셔, 레스터셔, 노포크, 서포크, 케임브리지셔, 헌팅던셔, 베드포드셔, 하트포드셔, 미들섹스의 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데인로의 행정 체계
바이킹들은 정착지에서 독특한 행정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특히 '파이브 버로우(Five Boroughs)'라고 불리는 다섯 요새 도시 - 더비(Derby), 레스터(Leicester), 링컨(Lincoln), 노팅엄(Nottingham), 스탬포드(Stamford) - 를 중심으로 한 연방제 형태의 통치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각 도시는 야rl이나 킹이 통치했고, 중요한 결정은 팅(Thing)이라고 불리는 민회에서 내려졌습니다. 이는 데모크라틱한 요소를 가진 독특한 통치 방식이었습니다.
🔹바이킹 정착의 특징
바이킹들의 정착 과정에서 주목할 점은 그들이 기존 앵글로색슨 주민들을 완전히 축출하지 않고 공존했다는 것입니다.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바이킹 정착민들은 기존 마을에 합류하거나 인근에 새로운 정착지를 건설했습니다.
바이킹들은 농업에도 뛰어났고, 특히 중무장한 자유농민(karls) 계층이 데인로 농업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또한 상업과 수공업을 발달시켜 요크, 링컨, 노리치 같은 도시들을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만들었습니다.
🏹문화적 융합과 변화
🔹언어의 변화
바이킹 정착은 영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습니다. 현재 영어에서 사용되는 수많은 기본 어휘가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했습니다. 'sky', 'knife', 'husband', 'egg', 'they', 'them', 'their'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한 '-by'(마을), '-thorp'(촌락), '-toft'(집터) 등의 지명 어미도 바이킹 영향의 산물입니다.
🔹법률 제도의 변화
데인로에서는 바이킹의 법률 전통이 도입되었습니다. 웨어길드(Weregild, 생명의 값) 제도, 집회(Thing) 제도, 배심원 제도의 원형 등이 바이킹들에 의해 전해졌습니다. 이는 후에 영국 법률 체계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종교적 변화
초기 바이킹들은 토르, 오딘, 프레이 등의 북유럽 신들을 숭배했지만, 정착 과정에서 점차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구트룸의 개종이 상징적 사건이었고, 10세기에는 대부분의 바이킹 정착민들이 기독교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독교는 여전히 북유럽 전통의 흔적들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예술과 공예의 융합
바이킹과 앵글로색슨 문화의 융합은 예술 분야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금속 공예, 조각, 석조 건축에서 두 문화의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양식이 나타났습니다. 특히 요크셔의 고드포스 십자가(Gosforth Cross)는 기독교와 북유럽 신화 모티프가 결합된 대표적 작품입니다.
🏹바이킹 침공의 장기적 영향
🔹정치적 통합의 촉진
바이킹 침공은 역설적으로 잉글랜드의 정치적 통합을 촉진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과 그의 후계자들은 바이킹에 대항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했고, 이는 후에 통일 잉글랜드 왕국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군사 제도의 혁신
바이킹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앵글로색슨인들은 군사 제도를 혁신해야 했습니다. 알프레드는 버(Burh) 시스템이라는 요새화된 도시 네트워크를 구축했고, 상비군의 개념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중세 유럽 군사사에서 중요한 발전이었습니다.
🔹해상력의 발달
바이킹에 대항하기 위해 앵글로색슨인들도 해군력을 키워야 했습니다. 알프레드 대왕은 바이킹보다 크고 빠른 전함을 건조했고, 이는 후에 영국이 해상 강국으로 발전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도시화의 촉진
바이킹들의 상업 활동과 요새 도시 건설은 잉글랜드의 도시화를 촉진했습니다. 요크, 더비, 링컨, 노리치 등의 도시들이 이 시기에 크게 발달했고, 이는 중세 잉글랜드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주요 인물들
🗿바이킹 측 인물들
이바르 더 본리스 (Ivar the Boneless, 794?-873)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로 추정되는 이바르는 대이교도군의 주요 지도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의 별명 '본리스'의 정확한 의미는 논란이 있지만, 뛰어난 전략가이자 잔혹한 전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노섬브리아 정복을 주도했고, 에드문드 왕의 처형에도 관여했습니다.
구트룸 (Guthrum, ?-890)덴마크 출신의 바이킹 지도자로, 878년 웨드모어 협정을 통해 알프레드와 평화를 맺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후 애델스탄(Æthelstan)이라는 기독교 이름을 받았고, 이스트앵글리아의 왕이 되어 890년까지 통치했습니다.
할프단 (Halfdan, ?-877)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또 다른 아들로 추정되는 할프단은 노섬브리아 정복 후 그 땅을 분할하여 정착한 최초의 바이킹 지도자 중 하나였습니다. 877년 스트랫클라이드에서 전사했습니다.
🗿앵글로색슨 측 인물들
알프레드 대왕 (Alfred the Great, 849-899)웨섹스의 왕으로, 바이킹 침공에 맞서 잉글랜드를 지켜낸 영웅적 인물입니다. 단순히 군사적 승리에 그치지 않고 법률, 교육, 문화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는 영국 역사상 유일하게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군주입니다.
성 에드문드 (Saint Edmund, 841-869)이스트앵글리아의 마지막 왕으로, 바이킹들에게 저항하다가 순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매우 잔혹했다고 전해지며, 후에 성인으로 추대되어 중세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순교자 성인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고고학적 증거와 사료
🔹주요 사료들
바이킹 침공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주로 다음과 같은 사료들에 기반합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Anglo-Saxon Chronicle)알프레드 대왕 시대에 편찬이 시작된 이 연대기는 바이킹 침공에 대한 가장 중요한 동시대 기록입니다. 하지만 앵글로색슨 관점에서 서술되어 편향적 측면이 있습니다.
●아서의 생애 (Life of Alfred by Asser)웨일즈 출신 수도사 아서가 쓴 알프레드 대왕의 전기로, 9세기 말의 정치적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북유럽 사가들아이슬란드에서 전해지는 사가들, 특히 라그나르 사가와 라그나르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들이 바이킹 측 관점을 제공해줍니다.
🔹고고학적 발견들
20세기와 21세기의 고고학적 발굴은 문헌 기록을 보완하는 중요한 증거들을 제공했습니다:
●레프턴 (Repton) 발굴더비셔의 레프턴에서 발견된 대규모 매장지는 873-874년 겨울 바이킹군의 주둔지로 추정됩니다. 수백 구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그 중 일부는 바이킹 전사로 추정됩니다.
●요크 (Jorvik) 발굴현대 요크 시내의 콥퍼게이트(Coppergate) 발굴에서는 바이킹 시대의 도시 생활상이 생생하게 드러났습니다. 주택, 공방, 상점들의 흔적과 함께 다양한 생활용품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금속 탐지기 발견들최근 수십 년간 아마추어 금속 탐지기 사용자들이 발견한 수많은 바이킹 유물들이 우리의 이해를 크게 확장시켰습니다. 특히 2009년 스태퍼드셔에서 발견된 보물은 바이킹 시대의 금속 공예 수준을 보여주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바이킹 침공의 유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향
바이킹의 잉글랜드 침공은 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지명의 유산영국 북동부 지역의 수많은 지명들이 바이킹 기원을 갖고 있습니다. -by, -thorpe, -toft, -thwaite 등의 어미를 가진 지명들이 바이킹 정착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언어의 유산현대 영어의 기본 어휘 중 상당수가 바이킹 기원입니다. 특히 일상생활과 관련된 단어들에서 그 영향이 두드러집니다.
●법률 제도의 유산배심원 제도, 지방 자치의 전통 등이 바이킹 시대의 유산으로 여겨집니다.
🔹문화적 기억과 재현
바이킹 침공은 후대의 문학과 예술에서 지속적으로 재현되어 왔습니다. 특히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바이킹들이 자유롭고 용맹